새뮤얼슨 vs 프리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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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슨 vs 프리드먼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명인 케인즈가 한 말이다. 얼핏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말은, 케인즈가 등장하기 전의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유명한 문장이다.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과 구분하기 위해 이제는 고전학파라고 불리는 그 전의 경제학은 시장의 자기 조정 능력을 믿고, 경기 침체나 불황이 발생하더라도 시장에 맡겨두면 결국에는(장기적으로는) 균형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정부가 시장에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균형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의 실업과 공황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케인즈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즈학파는 고전학파를 주류의 자리에서 밀어냈지만, 정부의 시장 개입은 여전히 경제학의 뜨거운 감자였다. 이를 둘러싼 두 학파의 주장을 이어받아 수십년간 논쟁을 이어온 20세기의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바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으로, 새뮤얼슨은 케인즈학파의 후예라고 할 수 있으며 프리드먼은 - 그 자신은 비록 부정했지만 - 고전학파를 잇고 있다. 「새뮤얼슨 vs 프리드먼」은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이 두 사람이 어떻게 경쟁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하고 현실에 반영하려고 애썼는지를 그리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비판하다가도 가끔씩은 존중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기도 한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경쟁이 두드러진 것은 1965년 뉴스위크지에서 둘의 컬럼을 번갈아가며 싣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이때부터 18년간 두 사람은 컬럼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하며 때로는 상대방을 맹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둘의 치열한 경쟁은 컬럼이 시작되기 전인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시작되었으며, 프리드먼이 먼저 세상을 떠난 2006년까지 장장 5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처음은 새뮤얼슨의 압도적 우세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케인즈주의는 혁신적 처방으로 대공황을 끝냈다는 평가와 함께 주류 경제학의 위치에 있었다. 새뮤얼슨은 케인즈주의를 바탕으로 신고전학파의 미시 경제 이론을 결합하여 신고전파 종합이라는 이론을 확립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완전 고용을 위해서는 적절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지만, 일단 완전 고용이 달성되면 시장 매커니즘에 맡겨 경제를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새뮤얼슨의 저서 「경제학」은 1997년에 맨큐의 경제학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경제학 교과서 자리를 차지했고 새뮤얼슨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다.
경쟁의 추가 반대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케인즈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은, 그 둘이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설명하는 케인즈주의를 주류의 위치에서 끌어내렸다. 새뮤얼슨조차 이를 인정하며 스태그플레이션이 '케인즈주의의 관에 대못을 박았다'라고 말했다.
한편 프리드먼은 1963년에 기념비적 저서인 「미국 화폐사」를 발표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 책은 그 전까지의 경제학 저서와는 달리 방대한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공황의 원인이 통화량 수축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큰 노력을 들여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경험적 증거를 해석해 도출한 결과였으므로 많은 경제학자들이 대공황의 진짜 원인을 밝혔다고 인정했다. 프리드먼은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1967년에 전미경제학회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쳤을 때,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이 물가 급등의 원인 설명과 해결책을 제시하며 신고전학파의 역습을 이끌었다.
통화주의란,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통화량이 경제 성장 속도보다 더 빠르게 증가할 때 물가 상승이 나타나는 것이며 다른 요인들은 단기적이거나 일시적 효과만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통화량 조절이 경기 변동을 제어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본다. 다만 고전학파의 계보를 잇는 그답게 프리드먼은 정부나 중앙은행이 재량에 따라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준칙을 따르라고 주장한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부던히 애를 썼다. 닉슨, 레이건, 그리고 영국의 대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줄 정치가를 찾았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닉슨은 언제든지 입장을 바꾸는 기회주의자였고 레이건은 경제에 무지해 뚝심있게 통화주의를 밀어붙이지 못했다. 대처는 프리드먼의 진실한 추종자였지만, 진정한 통화주의의 실현은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서 현실 경제에 있어서의 통화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막상 통화량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부터가 난해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대처의 영국은 심각한 실업과 고금리를 맞이하였고 통화주의 실험은 막을 내렸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이어져온 경쟁은 이제 2000년대로 넘어온다. 그러나 경제학의 두 거성은 이제 인생의 말년에 이르렀다. 프리드먼은 2006년에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1~2년을 더 살았다면 자신의 이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2007, 2008년의 금융위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에 앞서 프리드먼의 사망 몇 달 전에 연준의장에 취임한 버냉키는 또다른 프리드먼 추종자였는데, 버냉키의 취임 소식에 프리드먼도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금융위기를 맞아 버냉키는 프리드먼이 절대 용인할 리 없는 양적 완화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양적 완화는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경기침체가 경제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새뮤얼슨은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신고전학파가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며 이미 고인이 된 프리드먼을 비판했다.
현대 경제에서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전혀 없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2020년의 코로나 팬더믹은 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코로나 시대에 정부의 재정지출은 경제를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새뮤얼슨 vs 프리드먼」의 저자도 직접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새뮤얼슨의 판정승이라는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이제 논점은 얼만큼 시장 개입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시장 개입을 해야 하는가로 옮겨왔다. 이 정도의 차이에서, 아직까지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경쟁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지난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시장 개입과 관련된 상반된 공약을 내세웠다. 한쪽에서는 취약 계층을 위한 재정 지출이나 증세,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를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법인세율 인하, 노동시장 유연화 및 규제 개혁을 강조했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은 하늘에서 한국의 상황을 보며 또 어떤 논쟁을 이어갈 것인가?